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시 참변 (문단 편집) === 군사재판과 '11월 결정서' === 수라젭카의 진압으로 대한의용군(사할린대대) 소속 병사 약 864명이 포로로 잡혔다. [[https://www.yna.co.kr/view/AKR20210819098400502|#]] 이르쿠츠크파의 주도로 이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이루어졌는데 [[홍범도]]가 이때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며 당시 발표된 상해파 규탄 [[성명]]도 홍범도, 최진동, 허재욱, 지청천 등 [[간도]] 독립군 지도자 27명의 명의로 되어 있다. 하지만 홍범도, 최진동 등은 이후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 이르쿠츠크파를 [[살인자]]라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'''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'''고 폭로한 바 있다.[* 주미희(2022),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, 역사연구(43), 201-243.] 이로 미루어 볼 때 간도 [[독립군]]들은 사태 무마를 위해 이르쿠츠크파가 내세운 얼굴마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윤상원 교수의 연구결과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. 아무튼 이렇게 해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결에서는 이르쿠츠크파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[[이동휘]]가 1921년 11월 '''직접 [[블라디미르 레닌]]과 면담하여 '11월 결정서'를 도출'''시키면서 상황은 또다시 반전되었다. '11월 결정서'는 기본적으로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제1항에서 [[코민테른]] 국동비서부(동양비서부)가 이르쿠츠크파를 편파적으로 원조해 충돌을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다. 또 양파 동수로 연합 간부를 구성할 것과 상해파 인사 80여 명을 석방할 것을 지시하였다. 이로써 두 고려공산당의 각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. 참고로 이후 발표된 '4월 결정서'에서도 모스크바는 상해파에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.[* 하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면 결국 이르쿠츠크파가 우세해졌다. [[이동휘]] 문서 참고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